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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하는 자와 재판받는 자 사이
2024년 04월 30일 (화) 16:08:32 경기중앙신문 webmaster@ggjap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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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앙신문]

   
▲고일광 변호사

어제 오후 친한 친구의 부친상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되어, 급히 비행기편을 구해 제주로 내려왔다. 오늘 아침 발인까지 지켜본 후 제주에서 유명한 고기국수 한 그릇 말아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코로나 이후로 가족휴가도 매년 제주로 왔던 터라 제주공항까지는 늘 차로 이동했었는데, 마침 식당과 공항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큰맘 먹고 걸어서 공항으로 가보기로 했다.

어제 비가 온 후 날이 활짝 개었다. 걷다 뒤로 보니 한라산이 뚜렷이 보이고, 앞으로 공항을 보니 푸른 바다가 뚜렷이 보인다. 큰 교차로 사이로 도로를 따라 1킬로미터씩 걷다 보니 이런 길이 있었나 싶게 가로수 잎들로 지붕을 이룬 호젓한 오솔길도 보인다. 오솔길을 걷다 보니 걷지 않으면 전혀 들을 수 없는 새소리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담벼락 너머로는 황토 텃밭도 한자락 넓게 펼쳐져 있다. 늘 일정 바쁘게 차로 공항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전혀 못보던 풍경들이었다.

그런가 보다. 바쁘게 빨리 지나다 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 아무도 주목해 주지 않는, 외로운 삶의 풍경들이 잠시 천천히 가다 보면 보이는 것 같다.

로펌 변호사로 개업한 후 지난 8년간 제법 많은 의뢰인들의 삶을 서면에 담아 판사님 보시도록 올려 드리고 법정에서 열심히 읽어드린 것 같다. 재판하는 판사에게는 많은 사건 중 하나이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판사의 숙명이기에 내 사건 하나만을 세심히 봐달라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차로 공항을 향하는 사람처럼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시선도 제한되어 있는 판사님에게, 재판받는 내 의뢰인의 삶의 스토리 중 무얼 가장 임팩트있게 보여드려야 의뢰인이 승소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다.

개업 초기부터 의뢰인 분들에게 종종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재판은 10분의 1 곱하기 10분의 1이다... 의뢰인의 삶의 스토리 가운데 변호사가 제대로 이해하고 서면에 담는 것이 10분의 1 밖에 안되고, 변호사가 서면에 담는 의뢰인의 스토리 중 판사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10분의 1 밖에 안될 수도 있다고. 그래서 곱하면 의뢰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100분의 1 밖에 판사에게 전달이 안될 수도 있다고. 그렇기에 변호사에게 자주 이야기하고 내 얘기 조금이라도 더 담아 달라고 조르시라고. 변호사가 알아서 하겠거니 넋놓고 있지 말고 변호사가 쓴 서면 꼼꼼히 보고 수정도 하면서 내 얘기가 100% 판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고 재판에 참여해야 한다고...

엊그제도 구속된 의뢰인들 중 항소심 판결로 몇 분만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미처 석방되지 못하고 감형만 받은 의뢰인을 접견하러 갔다 왔다. 실형을 선고받은 아들을 두고 법정을 나와 통곡하던 의뢰인의 어머니와 의뢰인의 아내의 눈물이 눈에 밟혀, 접견하면서 의뢰인을 붙잡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의뢰인의 억울한 사정을 100% 판사에게 전달하려고 애썼지만, 혹시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밖에 반영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람이 하는 재판인지라 판사든 변호사든 사건에 투자하는 시간과 사건에 대한 이해력이 완벽할 리 없다. 재판받는 의뢰인과 변호사 사이의 10분의 1 간격을 줄여주는 변호사, 변호사가 제출한 서면과 재판하는 자 사이의 10분의 1 간격을 줄여주는 판사가 훌륭한 변호사, 판사가 아닐까 싶다.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0분 밖에 없는 판사에게, 공항 가는 길에 있는 울창한 가로수길과 그 안에 지저귀는 그많은 새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면, 녹음이 우거진 푸른색과 그 옆에 펼쳐진 짙은 황토색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면, 재판하는 자와 재판받는 자 사이의 거리는 훨씬 좁혀질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만 천천히 걸을 수 있다면 사법신뢰, 재판에 대한 신뢰는 어느새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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