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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이미….
2023년 12월 25일 (월) 14:41:55 박윤옥 시인 webmaster@ggjap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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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앙신문]

   
▲박윤옥 시인

며칠 전 고향인 아산시 풍기동을 다니러 가는 길에. 하늘아래 나의 고향은 별일 무사하리라고 굳게 믿고, 설레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전동차에 이르길 천천히 가라며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고,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 산 너머 읍내(리)동 개천 너머로 보이던 장엄한 설화산을 가리는 아파트를 비키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배방면을 지나며 선문(동)리 다리를 찾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지난 실개천이 그 다리인 줄 알고 실망을 하는 순간 어느새 전동차는 2층으로 올려진 역사로 바뀐 온양온천역에 닿고 있었다.

나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모릇 솟아나는 동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열차는 예전의 그 유명한 신혼여행지, 온양온천역에 도착했다. 추억을 회상할 겨를도 없다. 빨리 내려야지 열차는 바로 신창으로 달리니까.

이미, 내 어릴적 할머니가 계시지 않고 할이버지와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내 형제들이 계시지 않는 건 행적적 조치라 치부하고 나의 뿌리를 찾으러 나선다.

과수원 한복판에 정사각형으로 지어졌던 내 본향, 마당이 있고 갖가지 실과가 열리는 나무가 즐비하던 고향집. 스므 걸음이면 우물이 있어서 마중물만 있으면 언제나 퍼 올릴 수 있는 그곳,

앞엔 미나리깡이 있어서 수시로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던 곳. 포도나무를 지나 대추나무를 돌아서 꽤 큰 단풍나무를 지나서 사과나무 네 그루를 지나면 동네로 나가는 사립문이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적 새벽이면 트럼펫을 불던 젊은 아저씨가 생각난다. 시골의 새벽이니 동물 소리만 나던 시절이라 신기하여 기다리던 소리이다. 그 아저씬 누군지 모른다.

가슴속에 그려져 있던 과수원 주변의 골목길을, 주변이 아카시아나무 울타리가 되어 여름엔 그 향기를 만끽하고 그 꽃을 훑어 손바닥에 두고 작은 꽃부터 먹던 동심이 생각나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주막집. 아버지의 막걸리 창고였다. 나는 집에 있는 날이면 수시로 아버지의 배를 채워드리곤 했다. 그 일은 국민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와 엄마가 막내동생과 서울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다.

지금은 그 주막거리가 없다. 동네 유일한 가게라 그 집은 매번 붐볐다. 집 안에서도 먹을 수 있는 방을 만들어서 손님을 받던 임씨 네가 하던 막걸리 가게다, 참 정겨운 집이다. 친구네 집을 가려면 무서워서 피해갔었던 큰 개가 있던 집이며, 항상 그 자리에 어미소가 묶여있었던 황씨네 집, 뒷동산엔 어쩌면 그렇게 잔디가 푸르게 자라 아이들의 운동장이 되었던 야트막한 동산, 여름엔 매미가 울어 젖히고 우마차가 있어 만지려면 옆에 있던 큰 소가 ‘움메’하며 고함을 지르던 고향. 어느 누구네 집의 숫가락도 몇 개가 있는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정겨웠던 고향을 걸어서 진입하기 시작했다.

방물장수가 할머니와 흥정을 하며 세상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 아련히 생각난다. 목에 걸고 다니시며 화장품이나 약을 팔곤 하셨는데. 예의 할머니는 웃음으로 그 사람을 맞아주시곤 하였다.

역앞에 '너더리.,' 가 씌여진 옹벽을 보는순간 엄마생각이 나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외가는 예산 신례원에 있다가 엄마가 풍기리로 이사 오시면서 온양으로 오신 듯 하다. '동방회관'이라는 외국영화 전용관이 있었고, 강필선 사장이 운영하던 그 당시 제일 큰 건물, 역마차 다방도 붙어있었던 온양극장이 안 보이는게 이상스러웠다. - 그 분은 나중에 신민당으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는데 공화당은 이민우인가 김세배인가. 낙선하신걸로 안다 - 이미 철로는 2층으로 개발되어 건널목의 운치가 사라져 바삐 가는 발걸음들만 보였다.

비포장도로 옆 물괸 논이 있어 물고기가 돌아다니던, 우렁이 느린 걸음을 옮기던 논이 있었는데. 또 초가지붕 사이의 시커멓던 굴뚝이 보이질 않는다.

어린 나의 머리를 깎으신다고 안경 끼신 할아버지 이발사가 뜯어 제키던 머리에 오른쪽 눈을 힐끔하던 표정을 지으며 찾은 풍기이발관도 보이질 않는다. 그 할아버지 이발사는 손을 한 번 움직이면 입도 한번 움직이셨다.

온양여중에서 동네 선배들과 축구경기를 하던 추억에 들여다보나 아무도 없었다. 전부 영어학원에 간 것이다. 걸으며 쳐다보았던 일정한 간격의 전봇대에 원기소라고 철판이 붙어있던 기름 먹인 나무 전봇대도 보이질 않는다.

지금 걸어온 길이 예전길이고 조금 오른편으로 왕복 4차선의 아스콘 도로가 깔려있는데, 그게 논을 메꿔서 길을 만든 것이다. 아이쿠, 이런 일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있었던 논이다.

늘 논을 보며 자랐다, 여름엔 메뚜기가 논을 심심하지 않게 했었다. 콜라병에 하나 가득 잡아서 할머니께 드리면 구워주셔서 아주 먹기 좋았다. 논 중간엔 둠벙이라는 물 저장고가 있어서 논에 물을 조달하기도 했었다. 논이 없는 건 이미 시골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도회지도 아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동네로 들어오는데 그 입구를 찾지 못한다. 물론 나가는 길도 없다. 이미 입구엔 건물들로 둘러쌓여 입구가 없어지고 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다른 동네가 세워진 것이다. 내가 바라보던 밤 줄, 그 사이의 논들, 논 사이로 난 길에 심겨졌던 푸르른 콩잎,

내 마음의 혈관이었던 논뚝길이 하나없이 다 없어진거다.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던 방죽이 작은 연못으로 바뀌어 수초가 무성하다. 놀이를 하지 않으니 수초가 큼직하게 커버렸다. 그 주변에도 전부 논이었지.

이미, 예전 나의 집 한가운데는 아파트가 드러누워 길게 자리하고 있다.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많은 집들이 나무를 대신하여 서 있다. 내 고향은 아스콘에, 콘크리트에, 보도블럭에 눌려 땅으로 꺼져버렸다.

내 고향에 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실에 너무도 현실이 원망스럽고 내 자신이 무기력하고 이렇게 먹어버린 나이가 서글퍼서 어디라도 가서 있는 힘껏 울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도저히 나를 낳아주신 엄마에게 아버지에게 고향이야기를 들려드릴 수가 없다는 게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과수원과 나의 고향을 깡그리 집어삼킨 집들을 밀어내고 예전에 모습으로 가져올 수 없음에 입술만 깨물 수 밖에 없었다. 저만큼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아버지와 엄마가 조용히 서 계신다. 이제 오니?

좀 서두를걸 그랬다 하기도 하시며. 이미, 구릉을 깎은 흙으로 낮은델 메꿔서 집 짓기좋게 만들어서 과거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이 된걸 너는 이제 알았니 하시면 핀잔을 받는듯 한게 나의 자격지심이 아닌가.

마침 허기도 달랠 겸 씨유에 들러 컵라면을 불리는 키작은 나무젖가락은 연신 허공을 휘돈다. 먹으며 연신 주위를 둘러본다. 아는 이가 오려나. 나 보다 어른은 다 돌아가신 듯하다. 다시 태어난 듯 상당히 멎적은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여태 남아있는 집에도 아무도 살지를 않는다. 이미, 판세는 뒤집어져 있는 것이다.

'선창' 이라는 노래(고운봉)가 생각난다, 아주 시기적절한 노래다. 우울려고 내가 왔는가. 웃으려고 왔는가. 아무도 없고, 나의 흔적이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행정상으로만 고향인 풍기리, 그나마 기억이라도 없었다면 정말 어쩌란 말인가. 동네의 안내판 만이라도 세워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동네의 젖줄이던 우물도 메꿔버려 맥이 끊긴 것이다.

더 이상 목이 메어 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기댈 언덕이 없어진 지금, 다시 터벅터벅 온양온천역으로 밀려왔다.

이젠, 고향을 찾을 일이 없으리. 청댕이, 밤줄, 마근대미고개, 능미, 너더리, 현충사의 뱀밭으로 일컬어지던 고향의 지명은 유래를 찾아보기도 전에 높이 세워진 유명한 브랜드의 집들을 보고 진정 삶의 질이 우리들의 마음을 뭉개고 세워진들 "홈 스위트 홈" 은 이루더라도 아파트가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해 줄 말이 없어진다. 개발이되며 신실한 사람들에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고향은, 이렇게 되기 전에 자주 가봐야 한다, 이게 정답이다. 고향이 없어지는 아픔을 좋아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어, 눈물을 머금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고향이다.

많이 벼르고 별렀던 고향을 가서 오래된 친구라도 있을까했던 나의 소망은 산산히 조각이 나 버렸지만, 그만큼 더 마음속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해가 가고오는 지금, 하루라도 더 빨리 다녀간게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본다. 어머니 아버지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건 비단 나만 그런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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