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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비!
2023년 09월 22일 (금) 01:24:21 박윤옥 시인 webmaster@ggjap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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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앙신문]

   
▲박윤옥 시인

한 여름 밤에도 수은주가 30도가 넘어 잠을 설치던 중에, 심야의 오토바이는 우렁찬 소리로 적막을 깨고 머플러가 깨질 듯 두드리며 청각을 훔치던 때가 며칠 전인데, 입추 백로를 다 보내고 추분을 앞세워 추석을 기다리고 있다.

흥건히 젖은 몸을 부대끼며 일터로, 일터로 향하던 우리의 신념은 애국심같이 희망을 찾고 비장스런 고귀한 눈동자였다. 그 여름은 분명히 우리에게 크나큰 행운을 주리라고 마음먹고 용케도 하루하루를 지냈다.

우리가 그렇게 어렵사리 지날 때, 해는 서서히 자신의 무거운 몸을 누이고 빛의 각도를 조절하여 인간의 보폭을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개개인의 마음에 골고루 필요한 만큼 복을 준비하고 있었고, 땀 흘리며 일하고, 굳은 살이 박힌 손바닥으로 깍지 못해 휘어져 내린

엄지 발톱 부러진 틈으로 간신히 숨 쉬는 발을 어루만지며 묵상에 젖는, 그런 마음에는 더 가을이라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기다림으로써 더 위대한 계절이다. 가을이 우리를 기다린 것이다.

우리는 무었을 보았나! 그동안, 들(野)을 보았던가, 산을 보았던가, 하릴없이 하늘을 바라봤던가. 어디곤 지정된 자리는 없으되 낯선 곳을 배회하기도 여러 번 이런가. 찾아지는게 없으니 길도 없는데 하염없이 걸으며 행운의 여신만을 기다려온 건 아닌지, 그러면, 그렇게 다닐 때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본 적은 있는가! 도심에선 별이 보이질 않는다. 별은 주위가 어두워야 잘 뵈는 법이다. 가던 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즉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력이 흐려져 더 어렵게 만든다. 혼자 몰래 이룬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두가 죽순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대하는 하얀 종이에, 지나온 하루를 그려야하는 곳엔 뭘 그려야 할지, 나는 또 다른 사람들 머리에 익혀지기나 했는지...

어렵게 서 있는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잠시 그의 말 벗이 되어주는 건 고사하고, 황급히 그 장소를 지나치기를 몇 번인지, 또 다른 이의 힘든 모습에 인색하면 안된다는 걸 누차 익히지만, 내가 힘들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봐도 되는데.

하기 어려운 문제나, 능력 밖이면 꼭 따라붙는, 세상에 벽이려니 하곤 자조하던 모습도 있었는데, 씨앗을 심어, 그 씨가 썩어 밀알이 되어 더 많은 소출을 이룬다는 걸 모르는건 아닌데, 지나면 한없이 우매한 순간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생각에 잠긴 순간에 마침 비가 온다. 이럴 땐 한참을 비를 맞아도 되겠다는 마음이다. 정수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친구를 만나서 이마를 타고 내려와 미간으로 흘러 입으로 들어가서 발바닥으로 나올 때까지, 그 빗물의 맛과 온도 무게로 신진대사를 실감하는 인생이 참된 인생이지 않겠는가. 또 그간에 설움을 비 올 때 실컷 풀어버리자. 마음껏 울고 가슴이 요동치게 반성하고, 지난 일들에 미안해하며, 다시금 인생을 돌아보며 올해 남은 삼 개월 준비를 하자.

우리는 갈라진 논 바닥처럼 뻣뻣한 손등도 덥석 잡아주는 인정있는 민족이다. 웬만큼 오는 비는 우산도, 우비도, 장화도 안 신는 민족이다. 오는 비를 가슴으로 받아 온몸으로 전하는 동맥의 저장고에 연결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논에 물이 고이면 다른 이의 논에 물고를 터주는 사랑이 있는 민족이다. 농번기에 오는 비는 농사를 번거롭게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간에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피곤한 심신을 쉬게 하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여유도 가지며 집 안팍을 둘러보는 시간도 가져볼 때, 내리는 비는 아주 유익하게 삶에 활력소가 되기 충분한 하늘이 내린 福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터전에 사는 미생물도 비가 오면 더 활발한 활동으로 보답한다. 산에 떨어지는 비도, 나무를 씻어 내리고 뿌리를 채우며 바위를 닦아, 산이 흘린 눈물을 자양분 삼아 계곡과 대지를 살피고 내를 이뤄 강으로, 강으로 바다에 향한다. 이미, 일찍이 내린 비는 푸석한 땅에 스미어 지구 깊숙이 들어가 있다가 지구가 목마를 즈음 샘이 되어 우리에 목을 적시는 생명수가 된다. 흙으로 만들어져 물에 씻기고 다시 가는 게 인생 여정이다.

소중하게 내리는 비이니 만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비는 스스로 저장되어 있다가 우리가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신비의 물질이다. 그러므로 전술한 대로 지극히 소중히 관리해야 한다. 올라갔던 대로 내려오니까. 조물주의 섬세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저녁이 되어 비는 그치고 내린 비로 세상이 깨끗하다. 도로를 달리는 마찰음이 예전과 달리 찰지다. 여분의 빗방울이 도로에 남아 힘들게 운영하는 자동자 바퀴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제 대지는 젖었다. 생명수를 채웠다. 줄기가 차야 줄기찬 팽팽함의 풍요가 있다. 심장을 떠난 적혈구가 힘차게 이동하는 것도 혈관이 건강해야 하듯이 건강한 풍요를 지향하는 우리의 마음들이 깨끗한 가을을 노래할 것이다. 공사장 인부의 콧등에 앉은 먼지도 이 비에 씻긴다.

지금까지 묵었던 잔재들이 이번 큰 청소기에 가슴을 쓸어내리듯 줘버리고 새로운 가을 마음을 준비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유난히 푸르러서 마음을 띄워도 된다. 여태 수고한 마음들을 위로하듯이. 이제, 바쁘더라도 하늘을 오래 쳐다보자. 우리의 거울인 눈도 구경 좀 시켜야할 게 아닌가. 지금까지 모셔왔던 그림이 보이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고, 손에서 내려놓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목청껏 소리쳐 자신에 이름을 사랑하자.

그리고 생각난 글들을 종이에 옮기자, 반드시 손으로 써서 마음에 들지 않다 싶으면 다시 고쳐 쓴다. 솔직한 마음을 쓰는거다.

수필처럼 긴 글을 짤막하게 줄이면 詩가 되고,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면 時調(시절가조)가 된다.

자신이 쓴 글을 읽고도 눈물이 나온다. 슬프던 기쁘던, 안타깝던 후련하던, 미련이 남았던 미안하던지 간에 글은 내 마음이 남아서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지금 비 온 뒤 적막한 산야에 나를 놓아두고 생활 낱말과 친해보자. 분명히 머리에 있는 기관이 좋아할 것이다. 진즉 오지 왜 이제 왔느내고.

올 가을에는 적어도 스무 편의 시를 써보자. 여름을 보내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걸 기록해 보자. 마음을 담아내는 일이다.

쓰면 된다.

가을엔 비, 이것부터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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