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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상실과 희망의 교차
홍경한(미술평론가) 주체이면서 타자이기도 한 동시대인을 말하다
2016년 12월 28일 (수) 15:32:19 김승원 기자 kimson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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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앙신문]

   
▲날지않는_새
   
▲엑스트라 5의 감성-그들의 미래가 알고싶다.
   
▲산길찾기
   
▲엑스트라 2의 감성

현재를 고찰하고, 미술의 존재가치가 법과 규율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유용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미술이 그것의 진정한 회복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할 때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작가의 행동은 매력적이다. 예술이 단지 취향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 미래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써 혹은 현대사회에서 ‘미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눈여겨볼 만한 가치도 낮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상황들, 밝거나 어두운 현상들을 시각언어로 구체화함으로써 동 시대성에 접근하고 있는 작가 설휘의 작업은 눈여겨볼 만하다. 거리를 둔 듯 가까운 자리에서 현대사회의 이면과 이중성, 빛과 어둠, 사회적 동일성의 구성과 해체, 의미의 재구성과 탈 영토화 등이 담긴 메시지를 화면에 담담히 옮겨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상정시킨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의 화력을 통해 일관성,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인 2006년경의 작업은 비둘기라는 새를 통해 현대인들이 처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써 존재하지만 철저히 고립적이고 배타적이면서 제도와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로써의 인간이라는 이중성을 비둘기라는 ‘도시화된 새’에 빗대어 담아냈다. 이 중 두 개로 분할된 화면이 등장하는 몇몇 작품은 외적인 것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되는 사회 속 편견과 외부의 시선, 원하지 않으나 결코 자아 중심적, 자의적일 수 없는 비 독립적인 인간상을 지정하고 있다. 즉, 이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주체이면서 타자이기도 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2007년과 2008년에 이르면서 공감과 곤혹의 사이를 관통한다. 이 당시 주요 주제이면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삼은 건 ‘감성’이지만 근본적으로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기 원류에 시선을 둔 채 보다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그는 2007년의 경우 분청사기와 자기를 통해 개인적 미학을 확장하고, 지켜야할 것과 변화하는 것, 잃어버린 것과 기억해야할 것에 대한 중층의 상황과 갈등을 녹여낸다. 한편으론 높은 파고처럼 다가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의 역사와 작가적 고뇌, 곤혹스런 사회사와 개인사가 중첩되는 부분도 없진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 이 당시부턴 외계의 대상을 오관(五官)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하려는 이성 대응적 방향이 뚜렷해진다.

이러한 방위는 2008년 <기억-흐르는 감성>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철학으로 굳어진다. 이때부턴 가슴에 부딪히는 언어의 한계를 지나 시간 순연이 개입되고, 전향되는 양상을 내보인다. 더불어 2007년부터 촉발된 감성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의식을 침묵의 복구를 통해 우회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며, 이는 이름 모를 식물들과 구름, 휘날리는 사선에서 자유로움을 갈구하지만 시간과 기억에 관한 내레이션을 주축으로 화면 곳곳에 자리 잡은 여러 자연물 등을 통해 흔들리는 우리네 초상을 담아낸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세상에 둥지를 튼 이들에게 부여된 공동의 기억과 다양한 편린들, 존재의 불완전함과 생명의 꿈틀거림 대비 짙어지는 번민,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 그럼에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인간사 등이 투영되어 있다.

설휘의 작품은 2009년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 초대 개인전 <감성의 내외>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실험적 시도를 꾀한다. 당시 그는 라이트박스를 만들고 그 전면에 그림을 부착시켜 불을 켜고 끄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라이트의 점멸과 소등에 의해 그림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며 중첩되거나 홀로 존재한다는 건 세계와 대상의 외연에 의한 판단을 배척하기 위한 장치이면서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세계, 상실되고 있으나 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내외’적 상황에 관한 자문을 뜻한다. 물론 그것은 본질과 원형에의 탐구, 물성과 자연성에 대한 질문과 갈음된다.[2] (이와 같은 작업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당시 설휘의 작품은 과정, 시간 그리고 기억이라는 해체 불가능한 반복적 경험의 축에 따라 하나의 현상이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적 존재가 되며 실재를 형성한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즉, 겉과 속 또는 명과 암의 양면성을 중심으로, 차이와 연기, 즉 차연(差延)을 통해 이미지의 본질을 바라보길 원하며, 다양한 인식 차원을 거치며 완성되는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개인전을 거쳐 2010년 이후 <페르소나의 감성>(2015)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보다 깊은 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진화한다. 전작에서의 사라지는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의 연장(기억-감성-내외-순연)에서 ‘섬’을 모티브로 상실감에 주목하고 인간사회의 불완전성을 암시적이고 감각적인 감성으로 이룩해낸다. 특히 이때에 이르면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망각과 더불어 잊히기를 거부하는 원형으로서의 삶이 ‘섬’이라는 고독한 상징을 통해 확연히 두드러진다.[3]

다만 그의 ‘섬’은 분명 침묵으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너머의 존재 혹은 비존재를 통해 지상적인 어떤 형상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써 자리한다는 데 그의 의미가 있다. 나아가 존재라는 자의식이 존재의 패배적인 자기부정과 조우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냉소적 유희 정신과 어떤 기대 희망적 메시지를 그리드 시킴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염원한다는 점 또한 ‘섬’이 지닌 의미랄 수 있다. 물론 그 섬이 우리네 삶의 기호임도 자명하다.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늘에 이른 설휘의 작품은 어쩌면 화사(畵史)의 과정 중 또 하나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 해도 무리는 없다.(향후 어떤 지점으로 향할 것인지도 필자 개인의 관심사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린 여러 범주를 엿볼 수 있다. 우선적으론 본인의 시선에 잡힌 나와 타인이 결합된 삶의 이야기이지만 조형적으로 고유한 성격을 나타내는 특징을 거세함으로써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중요성을 말한다는 점, 이미 저장되거나 공히 익숙한 침묵을 시각언어로 재생산하여 전달해야 할 것임에도 전달되지 못하는 것들, 받아들여야 하나 수용되지 못할 것들에 대한 것들에 대해 읊조리고 있다는 점, 발견되지 못한 자신의 감성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통해 삶의 지층에 의해 덮인 우리 내부의 여러 문제의식을 표출시키는 시도를 해왔다는 점 등이 그렇다.

물론 작가의 작품에선 드러난 것, 다양한 사물과 대상으로부터 인지되는 것과는 달리 감정을 공유하고 사유할 수 있는 매개로써의 조형성을 견지해왔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것은 설휘 작업의 특징으로 빚어지고, 회화를 넘어 새로운 실험적인 작업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이는 흡사 정통적인 통사법의 구사와 불완전한 구문처리, 똑떨어지는 지시어를 통한 명료한 기호들로 가득해 변별력을 가중시키는 문학적 관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기호들은 암시로 가득한, 그러나 모호하지만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표현들(화면을 가득 채운 사선과 사라짐을 상징하는 여러 자연물[4], 개성을 상실한 인물들, 나열된 채 흑백으로 처리된 사람 등), 비의적인 상징으로 환원되는 여러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이미지들은 그의 작품에서 단순한 인식 이외의 정신적 흐름을 느끼도록 하는 촉매로 작동하고, 머릿속의 회전속도에 비해 감정의 여울이 더욱 깊게 회동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다. 나아가 이것을 완성하는 알고리즘은 공간과 시간-기억-감성-안과 밖-삶과 사회-인간과 역사-현상과 사물과 같은 여러 기의에 의해 구현된다.

특히 공간은 그의 작품에서 적절한 예술문장의 집합소와 같다. 즉, 그에게 공간이란 화자의 말참견이 좌절되는 언어 저편의 세계이면서 실제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공간은 화자의 실어증을 불러오는 장소이자 말할 수 없는 것/말하지 않아도 알거나 알 수 있게 되는 것/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만 매번 절망과 허무에 부딪히는 감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공간에서 눈여겨봐야할 부분은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 및 권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면에서의 드러남과 감춰짐의 이중성처럼 어느 한편에선 반드시 긍정적인 삶의 온기와 희망을 언급하는데, 단지 우리에게 놓인 현실과 인간존재성이라는 것 자체가 꽤나 불완전하고 불안하다는 바탕이 온전한 전달을 고의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이를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빌려 재구성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희망이란 ‘아직 아닌 존재’의 존재론과 연관되며, 완성되지 않은 존재로써 자신의 모든 본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와 같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도 이와 맞닿는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해석은 근작들에서 두드러진다. 우선 작가는 2015년 이후 발표한 <페르소나의 감성>에서 존재론적, 필연적 이중성, 좌절과 희망의 양면성을 강하게 언급한다. 즉, 동시대 인간은 가면을 쓴 인격과 감성 사이를 활보하며 인간의 감성 또한 가면을 쓴 인격으로 대체된 채 원래의 감성을 귀납시키려는 자연스런 움직임이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라캉(Jacques Lacan)의 발언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대타자 사이의 관계로써의 불안에 기인하고, 상징의 거세를 통해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과 연계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현상적으로 자리하는 것이 페르소나이다. 문제는 대타자 자체도 비일관적이며 분열되어 있다는 점인데 작가는 이를 감성의 본질에서 해답을 찾는다.

이러한 작업경향은 근작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서바이벌 맨>, <스노우 맨>, <엑스트라 8의 감성>과 같은 작품에서 현대인들의 불안과 불완전한 현재를 목도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림 속 여러 장치들, 즉 이상성을 지정하듯 지평선과 맞닿은 채 산발하는 식물들, 꿈과 욕망-소통을 상징하듯 하늘 높이 날아가는 패러글라이딩이나 눈과 구름 등의 희망적인 낭만적인 상징들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는다. 반면 제도화된 체제를 열람하게 하듯 일렬로 서 있는 군상들(마치 배우 같은), 그 무리 중에서 유독 흑백으로 처리된 익명의 인물, 붉은 색으로 그려진 <서바이벌 맨> 등에서처럼 내가 살기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잔혹한 사회, 개성을 상실한 채 순응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 고착된 구조(시스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좀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담아내면서도 작품 어딘가에는 상실 속에서 찾는 희망을, 잃어버린 감성에 대한 고뇌를 녹여낸다.[5]

다만 이와 같은 장면들은 설휘의 과거 작품 대비 비교적 직접적이지만 사실상 개념적으로 접근할 때 보다 수월한 독해가 가능한 아이러니를 함유한다. 그것은 마치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복잡한 사선이 관계망과 자유로움의 갈망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처럼 분명 “침묵으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너머의 존재 혹은 비존재를 통해 지상적인 어떤 형상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시키는 그만의 방식”을 앞서 이해해야 함을 가리킨다.[6]

이는 달리 말해 그의 근작들은 미적 결과보다 미적 태도가 형식이 될 때 보다 실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즉,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알거나 알게 되는 과정에서 머리보다 가슴이 앞설 때 자연스럽게 공감이 생성되듯 설휘의 작품들에서도 개별적 분석보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는 것, 2005-2006년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을 고찰하는 것에서 그의 작품에 내재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파악해야 비로소 심미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음에도 시공의 테를 덧댐으로써 공유되는 소리들을 경청할 수 있고, 시각적 범주에서 이탈해 미학적, 철학적 쓰기와 읽기에 방점을 두고 있는 작가의 의도가 감각적으로 개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7] 여기에 시각의 건축학으로부터 하나의 기억술에 동시대성이라는 산책을 더하고 있는 작가의 삶을 탐구할 수 있다면 보다 명료해지는 그의 조형언어와 가치 역시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설휘 작가의 주된 관심사이자 주제인 존재성과 감성의 연결, 현대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밀착성이 자신의 철학과 온전히 호흡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때문에 2007년 이후의 작업은 오늘의 작업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미술평론가 정성희의 해석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2009년 작성한 작품론에서 “설휘의 작품은 인간의 고정된 인식과 시각의 기준을 형성하는 빛을 결정적 도구 삼아,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차이, 드러내기와 감추기와 같은 흥미로운 반전 요소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킨다.”며 “언제나 예술적 배경에서,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존재의 역할을 다해 온, 빛 그 자체가 설휘의 작품에서는 전체와 핵심을 고루 형성하는 결정적 주인공이 된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작가는)과정과 존재라는 형이상학적인 도구에 따라 인간의 시각적 인식 너머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물질의 본질을 탐구한다.”면서 “빛을 통해 불투명함과 탁함을 투명하고 선명하게 만들어가는 현실적 과정을 통해 현실적 존재감을 만들어 내며, 시간과 공간이 상실된 평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작품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동양화를 보는 듯 적막감과 고독감, 허무함과 상실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여백을 통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미지의 세계를 열람케 한다.

설휘의 작품에 있어 자연물은 일종의 사라지는 것들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연이 호출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자연은 죽는다. 비록 그 죽음이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해서, 생과 사가 순환하는 자연의 위대한 순환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예비 되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이전에 죽음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개체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개별자가 맞닥트려야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해서, 작가의 그림은 자연에, 자연의 생리에 빗대어,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고, 모든 죽는 것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부터의 노래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상실감의 대상이 섬으로 옮아오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고 해석했다.

하나하나의 일상적 장면이 늘어선 근작들을 보면 그 해석과 구성의 연이음이 돋보임에도 예술자체 보다 삶이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며 불투명한지도 모른다고 읊조린다. 이는 넓게 보아 소통의 도구인 이성과 논리는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변화하기 일쑤인 반면, 이를 묶는 예술가적 직관이 어제의 본질과 미래의 본질을 연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작업과 사고에선 시각적 구조를 확립하는 예술가들에게서 목도되는 동일한 접목지점이 읽힌다. 즉, 어떤 매체로 현실을 재현하고, 무언가를 반추토록하며, 자신만의 언표를 통해 메시지를 생성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본 평론이 어쩔 수 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마냥 그의 지난 서사를 읽어야 그의 작품에 숨겨진 미술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술가로써의 역할을 함유하는 것이기도 한데, 예술가들은 범인(凡人)들과는 달리 개인의 개체적인 상황과 환경이 다르고 조건과 가치관이 상이한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선택하고 제시한다. 작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 발언이 요구되는 것들을 비롯해 여러 현실적인 조건들과 심리적인 가치들을 버무려 뜻밖의 결과물을 생산해낸다. 우린 그 결과물을 ‘표상’이라 부르고, 표상은 곧 역사적 동시대성에 속한 개별적인 속성의 예술가를 일컬으면서 개별자로서의 속성을 포기할 수 없는 역사적 동시대성 속 예술가를 표면화 한다. 이 가운데 작가 설휘는 우리 시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성과 그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사에 주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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